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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생활 중 슬럼프가 온 이유

by 열한시삼분 2026. 1. 31.

독일 유학 관련 이미지

 

바이올린 전공자로 독일 유학을 하며 겪는 슬럼프는 단순히 실기나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그 시작은 아주 다른 곳에서 온다. 나의 경우에도 연습이나 시험 자체보다 인간관계에서 생긴 충격이 모든 리듬을 무너뜨렸다. 좁은 유학생 커뮤니티, 감당하기 힘든 오해와 갈등, 거기서 오는 감정의 파도. 그 안에서 내가 어떻게 버텼고, 또 어떻게 회복해 나갔는지를 담아본다. 연습을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연습 자체를 붙잡을 수 있는 마음을 지키는 일이 왜 중요한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연습보다 더 크게 무너졌던 건 마음이었다

내가 겪었던 가장 깊은 슬럼프는 악기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연습이 안 풀릴 때도 있었지만, 그건 늘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일이었고, 그 자체로 크게 무너질 일은 아니었다. 진짜 힘들었던 건 예상하지 못했던 인간관계에서 시작됐다. 독일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그 안의 좁은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갈등은 연습이나 수업보다 더 큰 스트레스를 줬다.

처음에는 단순한 오해라고 생각했지만, 상황이 커지고 나를 향한 말들이 돌기 시작하면서 황당함과 분노가 차올랐다. 그런데 그 분노는 오래가지 못했다. 점점 ‘내가 뭘 잘못했을까’라는 자책으로 바뀌었고, 그 자책이 곧 우울로 번졌다. 무언가를 해명하거나 정리할 힘도 없고, 사람을 마주하는 것도 피하게 되면서 점점 더 조용해졌다. 당연히 연습도 흐트러졌다.

악기는 쳐다보기도 싫어졌고, 연습실 문을 열어야 하는데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갈 정도였다. 이런 상태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교수님은 내 연주만 들어도 알아채셨다. “산책은 했어?” “요즘 좀 쉬었어?” 이런 질문들을 던져주셨고, 그 질문이 나를 가만히 붙잡아줬다. 그 말들이 없었다면 그냥 더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사람으로 다친 마음은 결국 사람으로 회복됐다

그때 나를 다시 붙잡아준 것도 결국 사람이었다. 독일에서 만난 비전공 친구들, 아르바이트를 하며 사귄 사람들, 그리고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의 대화가 큰 힘이 됐다. 음악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 나를 ‘학생’이나 ‘음악가’가 아니라 그냥 한 사람으로 바라봐줬다. 그게 이상하게도 굉장히 위로가 됐다.

특별한 말을 듣고 위로받은 건 아니었다. 그냥 아무 일도 없는 듯 일상을 이야기하고, 웃고, 밥을 먹는 것만으로 조금씩 평정심이 돌아왔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결국 사람과의 연결로 회복되는 경험이었다. 한 번은 카페에 앉아 친구랑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머릿속이 조용해졌던 기억이 난다. 그날 이후로 조금씩 악기를 다시 잡을 수 있었다.

연습을 무리하게 다시 시작하진 않았다. 단 30분이라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손에 악기를 얹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해도 되나?” 싶은 마음이 들었을 텐데, 그 시기에는 연습 자체보다 내가 악기를 ‘거부하지 않고 다시 만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그게 내 회복의 시작이었다.


다시 중심을 잡게 해준 건 결국 나 자신이었다

슬럼프를 지나고 나서 달라진 건 연습 루틴이나 방식보다는 내 안의 태도였다. 예전에는 흔들리는 감정 하나하나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고, 나 자신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그 시기를 겪고 난 이후에는 감정의 흐름을 조금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다. 우울하다고 해서 내 전부가 그런 건 아니고, 불안하다고 해서 내가 틀린 건 아니라는 생각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사람들의 말이나 시선에 휘둘리지 않으려고도 많이 노력했다. 연습량보다 중요한 건 내 마음을 정리하는 일이었고, 그 정리가 끝나야 손이 제대로 움직였다. 멘탈이 흔들릴 때는 연습의 질이 눈에 띄게 떨어졌고, 집중력도 무너졌다. 하지만 그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그럴 수도 있다”는 여유를 갖게 됐다. 내 안의 균형을 스스로 잡으려는 노력이 조금씩 쌓여서, 어느 순간엔 이 낯선 나라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가끔은 “그때 그 슬럼프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그 시간 덕분에 나는 더 단단해졌고, 연습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도 훨씬 유연해졌다. 다시 슬럼프가 오더라도 이전처럼 무너지는 일은 없을 거란 확신이 있다.


무너지는 순간이 있어도 괜찮다는 걸, 그 시간이 알려줬다

유학생활은 음악보다 사람이 더 어려울 때가 많다. 음악은 고된 훈련을 하면 언젠가 결과가 나오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나를 지치게 한 것도 결국 사람이었고, 다시 회복시켜준 것도 사람이었다. 그 안에서 내가 배운 건, 슬럼프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무너질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용기를 냈을 때, 나는 비로소 내 마음을 돌볼 수 있게 되었다. 감정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감정을 품고도 연습을 계속할 수 있는 힘. 결국 그게 진짜 실력이라는 걸, 그때 처음으로 배웠다. 지금도 다시 그런 시간이 오지 않기를 바라진 않지만, 만약 온다면 이번엔 훨씬 더 단단하게 잘 지나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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