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유학을 시작하며 가장 먼저 부딪힌 벽은 수업도, 연습도 아니었다. 악기를 꺼내기 전, 해결해야 할 일들은 이미 책상 위에 가득 쌓여 있었다. 거주 등록, 비자, 보험, 은행 계좌, 휴대폰 개통까지. 하나하나만 보면 복잡해 보이지 않지만, 이 모든 과정을 외국어로, 혼자서, 정해진 기한 안에 해내야 한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독일 생활 초반, 내가 가장 자주 느꼈던 감정은 낯설음보다도 ‘아무도 대신 해주지 않는다’는 현실감이었다.
낯선 나라에서 가장 먼저 마주한 건 ‘서류’였다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해야 했던 일들은 의외로 명확했다. 거주 등록을 하고, 은행 계좌를 만들고, 보험에 가입하고, 비자를 연장하는 것. 문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순서로 해야 하는가’였다.
A를 하려면 B가 필요했고, B를 하려면 C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 순서를 처음부터 차분하게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직접 부딪혀 보면서 하나씩 맞춰가야 했다.
비자를 연장하려면 거주 등록이 필요했고, 거주 등록을 하려면 집 계약서가 있어야 했다. 은행 계좌를 만들기 위해서도 거주 등록 증명이 필요했고, 보험 가입 여부는 거의 모든 행정 절차에서 기본처럼 따라왔다. 서류 하나라도 빠지면 “이건 안 됩니다”라는 말과 함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했다. 예약을 다시 잡고, 다시 기다리고, 다시 설명하는 일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었다.
행정 사무실의 분위기도 만만하지 않았다. 친절한 직원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빠른 독일어로 필요한 말만 하고 대화를 끝냈다. 질문할 타이밍을 놓치기 쉬웠고,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가 나중에 문제를 발견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느껴졌던 건, 내가 아직 ‘학생’이기 이전에 ‘외국인’이라는 사실이었다.
비자와 보험, 시간을 가장 많이 잡아먹었던 것들
독일 생활 초반 가장 신경 쓰였던 건 단연 비자였다. 비자는 유효기간이 분명했고, 그 기한 안에 모든 서류를 준비하지 못하면 체류 자체가 불안해졌다.
비자 연장을 위해 AMT에 가면,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외국인들이 줄을 서 있었다. 번호표를 뽑고 나면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두 시간 이상 기다리는 게 기본이었다. 모든 서류를 완벽하게 챙겼다고 생각하고 내 순서를 기다렸는데, 막상 창구 앞에 앉아 들은 말이 “이 서류 하나가 부족하다. 다시 와라”였던 날도 있었다.
물론 준비를 완벽하게 하지 못한 내 책임이 가장 크다. 그래도 비자 연장 때문에 수업을 빠진 날, 그 말을 들었을 때의 허탈감은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관공서를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무 말도 하기 싫은 채 멍하니 걷던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
보험 역시 쉽지 않았다. 학생 보험이라는 개념 자체가 한국과 달랐고, 조건에 따라 가입 여부가 달라졌다. 보험이 늦어지면 비자 연장도 함께 막히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늘 동시에 해결해야 했다. 정해진 도움 창구 없이 모든 책임이 개인에게 돌아오는 구조 속에서, 실수의 부담 역시 온전히 내 몫이었다.
이 시기에 유독 강하게 남아 있는 감정이 있다.
비자 받으러 갈 때, 그리고 입시 시험장에 들어가기 직전.
그 순간만큼은 분명하게 ‘아, 나 여기서 진짜 혼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아서 해야 한다’는 시스템에 적응해 가는 과정
독일의 행정 시스템은 친절함을 전제로 만들어진 구조는 아니었다. 대신 명확함과 책임이 중심에 있었다. 필요한 정보는 어딘가에 다 적혀 있지만, 그걸 찾아보고 이해하고 실행하는 건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었다. 감정적인 사정이나 설명은 크게 고려되지 않았고, 조건을 충족했는지가 판단 기준이었다.
처음에는 이 방식이 차갑게 느껴졌다. 하지만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이 시스템이 요구하는 태도를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 준비되지 않은 질문보다는 정확한 서류가 중요했고, 말보다 증명이 먼저였다.
그 이후로 나는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모든 서류를 파일로 정리하고, 예약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는 사람이 됐다. 메일과 편지를 쓰는 형식에 익숙해졌고, 중요한 일은 두 번, 세 번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기다림에 대한 인내심도 길어졌다. 한 번에 일이 처리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미리 전제로 두게 되었고, 실제로 안 되더라도 예전처럼 크게 흔들리지 않게 됐다.
행정은 버텨낸 사람이 남는다
돌이켜보면 독일 유학 초반 가장 힘들었던 건 전공도, 언어도 아니었다. 생활을 가능하게 만드는 행정 절차가 가장 큰 관문이었다. 이 과정을 넘기지 못하면, 아무리 연습을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간을 지나오면서 독일 생활에 필요한 기본 체력이 길러졌다. 혼자 준비하고, 확인하고, 책임지는 방식에 익숙해지면서 이후의 유학생활은 훨씬 덜 흔들렸다. 그때의 나는 분명히 어렸고 서툴렀지만, 그만큼 용감했다.
독일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면 행정 절차를 부수적인 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오히려 독일 생활의 첫 수업에 가깝다. 이 과정을 통과하고 나면, 이후의 문제들은 조금 다른 눈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독일에서의 시작은 언제나 서류 한 장에서부터였고, 그걸 넘긴 사람만이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