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 독일에서 집을 구하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부딪혔던 건 언어보다도 '내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이었다. 계약서에 적힌 독일어는 차라리 번역하면 되니까 괜찮았다. 문제는 아무리 내가 준비되어 있어도, 이름 한 줄에 이미 판단이 끝나버리는 낯선 시선이었다. 수십 명이 집을 보러 와도, 서류를 들고 있는 건 나 혼자일 때도 있었고, 반대로 그 누구도 내게 말을 먼저 걸지 않았던 순간들도 있었다.
그래서 모든 걸 준비해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나를 선택해주지 않을 수 있다는 현실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내가 움직여야 했다. 집 계약은 서류 싸움이었고, 침묵 속에서도 먼저 손 내미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 반복된 경험이 쌓이면서 나도 조금씩 유학생에서 ‘독일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선택과 실패들 덕분에 스스로가 꽤 단단해졌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
낯선 언어보다 낯선 시선이 더 힘들다
말 그대로 막막했다. 독일어가 어렵다기보다는, 뭘 몰라야 한다는 걸 몰랐던 상태였다. 질문도 못 하고, 뭘 물어봐야 할지도 몰랐다. 지금은 번역 앱 하나면 대부분 해결되지만, 내가 집을 처음 구하던 당시엔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잘못 이해하면 입주 자체가 틀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긴장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경험하다보면 계약서에 나오는 단어들은 사실 몇 번 겪다 보면 반복되는 구조라 익숙해진다. 언어가 해결되니 그 다음은 문제는 ‘내 이름’이었다. 국적이 바로 드러나고, 이름만 봐도 아시아계 외국인이라는 게 표시되는 상황에서 이미 1순위로 고려되지 않는 기분. 계약서에 적힌 독일어는 번역이라도 되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하지 않아도 드러나버리는 국적과 이름, 피부색은 그 자체로 이미 기준 밖이었다. “내가 만약 집주인이라도 한국 사람이면 좋지, 굳이 외국인한테 주고 싶진 않을 것 같아.”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너무 현실적인 말이어서 더 씁쓸했지만, 동시에 이 싸움은 말이 아니라 준비로 설득해야 하는 거라는 걸 받아들이게 됐다.
물론 그 누구도 인종차별을 했다거나 대놓고, 직접적으로 차별 발언을 하진 않았지만, ‘당신보다 더 유리한 조건의 누군가’가 있다는 분위기는 늘 있었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오래간다. 나중엔 체념하게도 되고, 어떻게든 준비로 돌파해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진다.
결국 서류가 모든 걸 말해주는 순간
그래서 택한 방법은 아주 단순했다. 집을 보러 갈 땐 꼭 내가 준비할 수 있는 서류 전부를 인쇄해서 가져갔다. 학생증, 비자, 여권, 재정보증서, 은행 계좌 잔고 증명서까지. 말로 설득하는 게 아니라, 아예 한 묶음으로 정리된 내 상황을 서류로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 거다.
가장 기억에 남는 집 계약이 있었다. 그 집은 입지 조건도 좋고, 시내 중심에 학교도 가까운 데다 월세도 위치에 비해 저렴하다보니 지원자가 정말 많았다. 다들 편하게 둘러보다 가는 분위기였고, 계약은 아마 현지 독일인에게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던 찰나, 내가 준비해간 서류를 보자마자 부동산 직원이 “당신이면 된다, 바로 계약하자”고 했다. 그 말 한마디에 지금까지의 모든 긴장감이 다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 뒤로도 난 이 방식을 계속 유지했다. 미리 메일로 서류를 보내거나, 방문 전부터 연락해 상황을 알리는 습관이 생겼다.
외국인이어서 더 준비해야 하는 것들
독일에서 외국인으로 집을 계약할 때 가장 중요했던 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도록 준비하는 것’이었다. 독일은 신뢰보다는 증거를 중시하는 사회고, 개인보다 조건을 먼저 본다. 말 한마디보다 서류 한 장이 훨씬 강력하다.
보증금 3개월치, 공과금 포함 여부, 난방이나 전기세가 별도인지 여부, 이건 무조건 확인해야 할 항목이고, 음악 전공자라면 연습 가능 여부는 필수다. 더불어 내가 겪은 조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이거다. “마음에 드는 집은 하루 이틀 고민할 시간이 없고, 바로 행동해야 한다.” 독일 집 계약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외국인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연습이 가능한 집을 찾고, 내 생활 리듬을 해치지 않는 조건을 만들려면 ‘운’이 아닌 ‘준비’가 전부였다. 특히 입시 중이거나 학교를 다니며 이사해야 할 땐 연습 환경이 집에서 되느냐 안 되느냐가 내 컨디션을 완전히 갈랐다. 이건 선택이 아니라 생존에 가까운 조건이었다.
계약은 사람보다 구조를 따라간다
처음엔 이 모든 과정이 부당하게 느껴졌다. 내가 외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무시당하거나 탈락하는 기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건 감정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걸 알게 됐다. 부동산은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서류 조건’을 보고, 선택은 결국 더 깔끔하고 부담 없는 사람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이 구조를 인정하고 준비하면 생각보다 훨씬 많은 문이 열린다. 외국인이기 때문에 더 유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준비된 외국인이라면 분명히 가능하다. 나는 그렇게 해서 다섯 도시에서 내가 원하는 조건의 집들을 모두 계약할 수 있었고, 그 집들에서 내 생활을 잘 지켜낼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역시 독일답네.' 라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곤 한다.
유학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말해주고 싶은 건 “집은 진짜 유학의 절반”이라는 거다. 연습, 휴식, 수면, 공부… 그 모든 게 이 작은 공간 안에서 시작된다. 집 하나 구하는 데 들인 시간과 에너지는 결국 그 도시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으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