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에서 보낸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시절이라기보다는, 가장 현실적인 시절에 가까웠다. 음악을 배우러 떠났지만 결국 배운 건 사람, 돈, 관계, 그리고 나 자신이었다. 예전의 나는 더 가볍고, 더 쉽게 웃고, 더 쉽게 믿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좋아진 부분도 있고, 잃어버린 것도 있다. 그 시간들이 나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솔직하게 돌아보고 싶어졌다.
웃음이 많던 아이에서, 말을 아끼는 사람이 되기까지
독일로 떠나기 전의 나는 비교적 단순한 사람이었다. 활발했고, 잘 웃었고, 사람을 좋아했다. 감정 표현도 숨기지 않았다. 싫으면 싫다고, 좋으면 좋다고 말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고, 누군가를 의심해본 경험도 거의 없었다. 세상이 나를 해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깊이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는 일은 늘 기대에 가까웠다.
하지만 독일에서 시간을 보내며 나는 점점 달라졌다. 여전히 웃고, 여전히 사람을 좋아하지만 그 모습은 이전처럼 자동으로 나오지 않는다. 내가 정말 편하다고 느끼는 자리에서만, 내가 상처받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 때만 예전의 밝은 모습이 드러난다. 말도 훨씬 아끼게 됐다. 예전에는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했다면, 지금은 한 번 더 생각하고 나서 꺼낸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는 하지 않게 되었고, 설명하지 않아도 될 감정은 굳이 드러내지 않는다.
계획에 대한 태도도 완전히 달라졌다. 예전에는 계획이 없어도 크게 불안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대부분의 큰 그림을 그려주었고, 나는 그 안에서 열심히만 하면 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모든 선택이 내 책임이었다. 집, 보험, 비자, 월세, 일자리. 하나라도 어긋나면 생활 전체가 흔들릴 수 있었다. 그 경험을 반복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규칙을 중시하는 사람이 되었다. 약속 시간, 계약 조건, 마감 기한 같은 것들이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생존의 기준이 되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성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는 융통성이 없다고 말하지만, 나에게는 이 방식이 스스로를 지키는 장치가 되었다.
순수함 대신 경계심을, 자신감 대신 현실감을 배우다
독일 생활이 나에게서 무엇을 가져갔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다가 결국 ‘순수함’이라고 말할 것 같다. 사람을 무조건 믿던 마음, 겁 없이 먼저 다가가던 태도, 이유 없이도 스스로를 믿던 자신감. 그런 것들은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닳아갔다.
여러 번의 인간관계 속에서 기대가 어긋나는 경험을 했고, 노력한다고 해서 반드시 원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배웠다. 특히 돈 문제는 나를 가장 크게 흔들어 놓은 요소였다. 음악을 공부하러 간 나라에서 어느 순간 나는 숫자를 계산하며 하루를 버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월세를 낼 수 있을지, 보험료를 감당할 수 있을지, 레슨비를 어떻게 마련할지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돈은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삶의 안정감을 좌우하는 절대적인 조건이라는 걸 그때 처음 실감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감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예전처럼 “나는 할 수 있다”고 쉽게 말하지 못하게 되었고, 무대 위에서도 책임감이 과도하게 앞서 예민해지기도 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던 시기에는 집중력도 떨어졌고, 그로 인해 스스로에게 더 실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대신 얻은 것이 있다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힘이었다. 감정에 휩쓸리기보다 한 발 물러서서 판단하려는 태도, 그리고 나 자신도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세였다.
생존의 시간이 남긴 것
돌이켜보면 독일에서의 시간은 ‘성장’이라는 단어로만 설명하기엔 조금 거칠다. 나는 멋지게 성장했다기보다, 그저 버텼다. 끝을 보지 않고 돌아가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쌓여 있었고, 여기서 포기하면 그 모든 노력이 허무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어떻게든 이어갔다.
이전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안다. 무조건 사람을 믿고, 계획 없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돈의 무게를 모른 채 웃던 그 시절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적어도 내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 사람인지 안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도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배웠다.
독일 생활은 나를 더 빛나게 만들지는 않았다. 대신 더 현실적으로 만들었다. 화려함 대신 안정감을, 자신감 대신 신중함을, 순수함 대신 분별력을 남겼다. 그리고 그 변화가 마냥 나쁘다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많이 흔들렸지만, 그만큼 단단해졌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간을 미화하지도, 후회하지도 않는다.
아프게 통과했지만, 그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돌아갈 수는 없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독일은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나라는 아니다. 다만,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조금 더 빨리 어른이 되게 만든 시간이었다. 순수함은 줄어들었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고, 돈과 책임에 대한 감각도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졌다. 예전처럼 아무 걱정 없이 웃고 떠들던 모습은 이제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나는 상황을 더 오래 생각하고, 쉽게 기대하지 않고, 내 몫을 스스로 감당하려는 사람이 되었다.
가끔은 생각한다. 그때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더 가볍고 더 밝은 사람이었을까. 자신감이 넘치고, 세상을 조금은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으로 남아 있었을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처럼 단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독일 생활은 나를 빛나게 만들기보다는 현실적으로 만들었다. 음악보다 인간으로, 이상보다 생존으로, 기대보다 책임으로 이동하게 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있었기에 지금의 나는 적어도 내 한계를 알고, 내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 사람인지 안다.
돌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시간을 지우고 싶지도 않다.
많이 부딪혔고, 많이 흔들렸고, 많이 배웠다.
그래도 결국, 나는 잘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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